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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12년 살면서 거주 이전의 자유는 공산국가에만 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미국은 철저히 카운티 중심, 시 중심의 사회로 지역마다 소득의 차이가 분명했다.

예를 들어 “저는 팔로스 버디스에 살아요”라고 말하면 그 한 마디가 그 사람의 소득수준을 말해주는 지표였다. 이사의 자유는 있어도 살고 싶은 곳에 살 자유는 없었다. 바닷가 근처에 살려면 무조건 부자여야 했다.

이런 사회의 특징은 자신의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는 순간부터 가난한 사람을 만날 일이라는 게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아한 집에서 우아한 이웃들만 만나고 우아한 직장을 다니면 그만인 것이다. 거주 이전의 자유를 경제력으로 제한해놓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행복하게 산다.

그들은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흑인 밀집지역인 캄튼이나 히스패닉 밀집지역인 헌팅턴파크 등에는 발을 들여놓을 생각조차 못한다. 오로지 그 커뮤니티 구성원들만 들어갈 수 있고, 소문에는 길가에서 총질도 한다는 악담이 퍼져있는 동네가 여럿 있다. 가난한 사람을 고립시켜 중산층 이상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모를 수 있게 도와준다.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예루살렘 인근의 여리고라는 마을이 있었다. 그 동네에는 삭개오라는 세금징수를 업으로 삼는 부자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뜯어내 로마에게 바치고 수수료를 받는 직업이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갈취한 돈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그 동네에선 삭개오의 아이와 삭개오가 착취를 하는 부모의 아이들은 한 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부모끼린 삭개오가 상전이었겠지만 아이들 사이에선 “젠장, 너희 아버지는 완전 깡패야. 그거 아냐? 좋겠다, 그런 돈으로 비싼 비단 옷 입어서”라는 욕을 삭개오의 아이들은 먹었을 것이다.

삭개오는 일제시대로 치자면 고등계형사나 동네 마름 쯤이었다. 그가 죄를 없애주는 능력을 가졌다는 예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를 만나려했다. 인파가 넘치는 길거리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려 예수를 찾았다. 예수가 그를 발견하고 그의 집에 가서 밥을 먹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누가복음 19장 7절) 말이 수군거림이지 그게 삭개오와 가족에게 안들렸을 리 없다. 집 앞에 모여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삭개오 가족의 귓전을 때렸을 것이다. “뭐냐, 예수는! 저런 로마에 몸 파는 더러운 놈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삭개오! 돈 주고 예수도 사려고? 면죄부도 사려고?” 이런 아우성이 빗발쳤을 것이다.

삭개오는 한 상 잘 차려놓고 가족들과 함께 예수랑 밥을 먹던 중에 봉변을 당했다. 당황한 삭개오는 일어나 자신의 재산을 내놓겠다는 선언을 했다. 자신이 비열하게 번 돈을 사기친 사람들에게 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예수 앞에서 죄를 용서 받고 싶어 가진 재산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의 선언에 예수는 구원을 선포한다.

염치가 존재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한 마을에 공존하던 시대의 이야기이다.

삼십대를 전부 미국에서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지나 새로 지은 아파트 촌 사이로 몇 십 년 째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중앙시장과 곱창집과 튀김집이 혼재해 있는 동네 한 복판을 지나서 한참을 언덕길을 올라야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나온다.

차를 타고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좋을 풍경은 끊없이 펼쳐진다. 칠순은 훨씬 넘어보이는 할머니는 박스 스무 장을 구루마도 아니고 달리도 아닌 무엇인가 바퀴 달린 것에 싣고 고달픈 한 걸음을 옮긴다. 도와드릴까 생각하다 너무 자주 부딛히게 되니 얼굴 표정을 보지 않으려고 외면한다.

영하 17도의 날씨에도 문 앞에서 생선을 팔려는 아주머니의 외침은 끊이지 않는다. 넘어질 듯 위태하게 짐을 쌓고 눈길 위를 달리는 주름 깊은 아저씨의 스쿠터는 매연을 뿜어낸다.

내 삶이 고단하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풍경을 15분씩 본 후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으니 이는 진정한 고역이다. 알지 않았으면 좋았을 풍경. 이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바닥의 사람들과 고층아파트의 거주민들이 함께 뒹구는 이 풍경.

강남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동네가 된지 오래다. ”저는 강남 어디 출신이예요”라는 말이 그 사람의 경제력을 가늠하게 해준지는 꽤 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서울의 많은 부분은 다양한 소득의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고 있다.

그것에 나는 희망을 걸어본다. 지금은 길거리에서만 부딛히지만 이 모든 사람들이 어우러져 수만 개의 공동체가 그 속에서 생겨나기를. 소득으로 사람을 나누지 않고 취향으로 함께 모이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세상살이의 고통과 신산함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 이 동네가 나는 불편하지만 좋다. 고향에 오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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