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진 판정 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옳은소리는 욕설 없는 방송을 지향한다.
확진 판정 받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옳은소리는 욕설 없는 방송을 지향한다.
내가 가족들과 명동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더니 방송이 나오는 거야. “국민 여러분, 지금 거대한 혜성이 대기권을 침입해 한반도를 향해 날아오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앞으로 45분 후 충돌 예정입니다.”
이런 방송이 나온다면 난 가족들을 데리고 하동관로 뛰어 가겠어. 그리고 난 양과 내장이 들어긴 특(₩12,000)을 시킬꺼고 아내와 아이들에겐 양은 똑같지만 고기만 들어있는 보통(₩10,000)을 시켜줄 꺼야.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가족들과 손을 잡고 그대들과 함께 했던 인생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할꺼야.
그러고도 시간이 허락한다면 새벽 4시 진통을 시작했던 첫 출산을 추억할꺼야. 17시간의 사투 끝에 세상에 나온 태리를 만났던 순간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줘야지.
갑작스러운 타향살이로 격심한 고통을 감내한 태연이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미안하다는 사과도 해야겠지.
그리고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이 달의 학생”으로 뽑혀서 받은 프로즌 요가트 쿠폰으로 훌륭한 디저트를 먹었던 일, 한국에 오자마자 난생 처음 눈 내리는 공원에서 눈싸움을 했던 일, 평화의교회에서 모든 가족이 주님의 픔안에 안기겠다는 서약을 했던 일 등을 떠올려보겠지.
물론 이건 맛집 리뷰야. 내가 하동관을 선택한 이유를 알려줄께.
1. 음식이 선불이라 먹다 혜성이 떨어져서 돈 안내고 밥먹은 놈인 상태로 소멸할 걱정이 없다는 점.
2. 주문을 입구에서 하고 식권을 받아 자리에 앉아. 종업원이 걸어와서 식권을 가지고 주방에 가 음식을 들고 다시 걸어올꺼야. 소요시간이 15초라는 점.
3. 메뉴라곤 보통, 특, 수육이라 다 만들어 놓은 것을 주기때문에 적당히 식어서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 지구 멸망의 순간이 아니라면 “뜨겁게 해주세요”라고 부탁하면 뜨거운 것을 줘.
4. 밥이 이미 말아진 상태로 나온다는 점. 소금으로 간하고 후추 뿌리고 파넣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는 점. 숟가락은 국에 꽂혀 나와.
5. 맛? 기가막히지. 저녁 장사도 없이 아침 7시에 문열어서 4시까지만 해. 저녁 장사하면 떼돈 벌텐데 생각할 수 있을지 몰라. 그런데 이미 떼돈 벌거든. 그러니 국물을 얼마나 우려서 주는지 몰라. 부드럽고 구수하기가 가이 없지. 고기는 부드럽고 재수가 좋으면 차돌백이도 꽤 건져먹을 수 있어. 양을 신기하게도 잘 맞춰서 한 숟가락에 고기 하나라면 끝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어.
주의할 점 몇 가지.
1. 4명이 간다면 한 테이블에 아는 사람들끼리 먹을 수 있지만 둘이 갔거나 혼자 가면 앞에 모르는 사람이 앉는 불편을 감수해야 해. 남자 둘이 가면 옆으로 나란히 앉아 다정하게 밥을 먹을 수 있지.
2. 여기 물 좀요. 이런 거 안돼. 참고 먹어. 나가는 길에 출입구 오른 편 물컵에 보리차를 따라두었으니 그걸로 입가심만 하는 거야.
3. 일단 깍두기랑 배추김치를 같이 담은 일인용 김치를 주는데 “배추김치만 더 주세요”하면 한 종류만 담은 그릇도 더 가져다 줘. 점심시간엔 미친듯이 바빠서 다시 뭘 시킬 엄두 따위는 안날테니 처음에 곰탕 가져왔을 때 추가를 하는 게 좋을꺼야.
4. 12시에 가면 줄을 50명쯤 서서 pink floyd의 소시지 뮤비처럼 딸려 들어가 밥 먹는 행위만 하고 나와야 해. 정신 차릴 틈은 없어. 남자 둘이 갔다면 네 옆에 다정히 앉은 네 친구와 얼굴을 바라보다 앞으로 고개를 돌리면 너희들과 마찬가지로 다정하게 둘이 앉은 정장입은 남자들을 만나게 될꺼야.
5. 허겁지겁 먹게 돼. 일단 줄 서있는 사람들의 숫자에 압도 당해. 앞에 앉아 있는 남자 직장인들도 미친듯한 속도로 먹어서 당신도 그 페이스에 말리게 돼. 고기가 부드럽고 국이 뜨겁지 않은데다가 국물까지 맛있으니 또 허겁지겁 먹게돼.
기운빠지고 위로가 필요하다면 11시쯤 하동관에 가서 곰탕 한 그릇을 권하고 싶어. 따스한 위로가 있는 국물이거든.
서울대 나온 아버지는 미국에서 납치돼 사라지고, 엄마는 한대수를 두고 재가.
다시 찾은 아버지는 기억이 뽑힌 채 양판점의 매니저로 백인 여자와 살고 있었고.
부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한대수를 떠났고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러시아 출신의 여성을 만나 다시 결혼했지만 부인은 알콜의존증으로 고통받아왔다.
20세기 한국 포크 락 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도 한 번도 인생의 갈증을 채울 수 없었던 한대수. 모두가 예전 히트곡이나 재생하면서 생계를 우아하게 꾸리는 와중에도 한대수는 명성에 걸맞지 않은 궁핍한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4집 이후에도 망하지 않는 음악가로 살아남았겠지.
“태어날때부터 저주받은 집안이다”라며 웃는 그의 얼굴에서 그 인생의 피곤함과 그 압도적 절망을 넘어선 청년의 빛을 다시 보게 된다.
신은 한대수에게 창작의 재능을 주고 나머지를 다 앗아갔다. 그의 인생은 고달펐으나 그로 인해 그는 재능을 아직도 살려 노래를 부른다.
우연성과 필을 중요시해 음반낼때도 3테이크 이상 가는 법이 없다는 한대수의 연주. 이게 마지막 행복의 나라는 아니겠지만…
행복의 나라 따위는 없다는 걸 알게된 후 듣는 맛은 또 별나다. 희망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희망의 나라를 찾는 게 인생이라는 걸 너무 일찍알아버린 그와 그걸 모르고 노래를 듣던 나와 그걸 알고 노래를 듣는 내가 어정쩡하게 만나는 자리.
다음 앨범이 기대되는 몇 안되는 거장.
한대수 – 행복의 나라로(Last ver.) MV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저린 가슴으로 읽은 후 오랜만에 나의 서양미술순례기를 뽑아 다시 읽었다. 6장의 중반쯤인가를 읽으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룍의 서쪽 끝에 있는 반도를 달리는 밤기차 속에서 새삼스럽게 나는 멀리 동쪽 끝에 맹장처럼 매달려 있는 우리의 ‘반도’를 생각했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가 되지만, 대개는 맥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 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주는 열매는 흔히 낯두꺼운 구세력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시당초 어떠한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도 직선적이지도 않다.
이 사실을 정말로 이해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쁘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께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이 간단치 않은 이해를 무조건 강요받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에서 거의 300년간 계속되어온 종교재판이 폐지된 것은 1834년이 되어서의 일이다. 스페인의 권위주의적인 전제체제는 간단히 말해서 1936년에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었던 한때를 제외하고는 결국 프랑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것이다.
한데 우리 ‘반도’ 사정은 어떤가……
이런 생각을 하며 멍청해 있으려니 객실의 천장 구석이며 도어의 그늘진 곳, 혹은 차창 너머 어둠 속에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는 괴이하고 불길한 무엇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차 속의 무료함을 잊었다. 그들이란 바로 벨라스께스의 난쟁이와 광대들, 혹은 또 고야의 「제 자식을 먹는 사투르누스」 「주먹질」 「마녀의 잔치」 따위 ‘검은 그림’의 갖가지 이미지들이다. ‘검은 그림’ 씨리즈 속에 한 점의 이색적인 개 그림이 있다.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라고 불린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의 개미 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나의 서양미술순례. 창작과 비평사,1991)
굵은 글씨의 대목에서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이제는 이방의 땅에서 디아스포라로 몇몇 사람들이 겨우 사람의 온기를 만들어가며 버티고 있었지만, 내가 살았던 그 땅이 침잠되어가는 모습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난 그 6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 개가 나라는 생각’에 결국 울고 말았다. 세상을 뒤집겠다는 기개는 고사하고 하루하루 살아남기가 버거운 인생을 살고 있는 나를 보고 있자니 분통이 터져 견딜 수가 없었다.
서경식이 이 책을 썼던 91년 나는 스무살의 청년이었다. 백주대낮에 쇠파이프에 머리가 깨져 죽은 강경대가 내 동기였다. 물론 다른 학교를 다니는 얼굴도 몰랐던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동갑이었다. 공권력이 말 그대로 백주대낮에 살인을 하고 다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가 없었다. 내 20대는 경대에 대한 죄책감과 공권력에 대한 분노로 흘러갔다.
벌써 그게 18년전 이야기인데, 여전히 공권력은 백주대낮에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고, 눈을 깔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가정의 가장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있다. 난 인터넷을 통해 그 광경을 그냥 지켜볼 뿐이다. 그냥 끝까지 울면서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를 악물고 지켜볼 뿐이다.
김규항이 블로그에 “상식의 이름으로”라는 한겨레신문 연재 칼럼을 올렸다. (링크)
싸움은 지속되고 있지만, 그 소중한 싸움의 성과를 엉뚱한 놈들이 독식하는 슬픈 역사 또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른바 상식의 이름으로.
소중한 싸움의 성과가 잠식 된것은 사실이지만, 난 왠지 서경식의 편을 들고 싶다. 그 희생이 열매를 맺고 있다고, 느리고 힘들지만 여전히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고, 김규항 같은 글쟁이들의 채찍질이 세상을 좀 더 계급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그래서 나도 모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개 신세이지만 오늘도 이런 글을 적고 있고, 내일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모아 온기가 살아있는 디아스포라를 만드리라 다짐한다.
여름인데도 엘에이는 서늘하다.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비라도 한 번 내려주면 좋겠다.